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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그리고 오늘

채소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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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학년 즈음인가 널찍한 인도에 얇은 포장 하나 깔고 할머니 댁에서 가져온 양배추 몇 개, 콩 몇 무더기 놓고 그렇게 부모님께선 노점 장사를 시작하셨다. 낯선 동네엔 아는 이들도 없고, 그때 나는 어릴 적부터 기차 화통 삶아 먹은 목소리에 온갖 짜증을 다 부려대서 사춘기는 짜증에 섞여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보내 버린 상태여서 학창 시절(대학교) 내내 우리 집이 노점에서 채소장사를 하는 사실은 전혀 창피한 게 아니었다. 물론 지금까지도 앞으로도(오빠나 동생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조그맣게 시작한 장사가 나무기둥 대어 보온덮개 씌우고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지금 아파트 주변에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땐 가능했던 일이었다.

첫 번째 보온덮개 가게에서 치킨을 시켰는데 가족들 기다리느라 지친 내가 무를 하나 몰래 먹다가 그 국물이 식도로 넘어가 숨이 안 쉬어져 밖에 나왔는데 아무도 없던 그 광경이란. 정말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그 아찔한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어서 아이들 치킨무 먹을 때마다 잔소리 꽃도 덤으로 안겨 주곤 한다. 폐기름통에 산에서 나무를 해 와서 얼린 손 녹이고, 대파 구워서 먹으면 어찌나 달디달던지 그 가게에서 조금 장사하고 반대편으로 넘어갔지만 자잘한 추억들은 그때의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들었던 온 가족의 노고를 덜어주고도 남을 커다란 선물이었음이 분명했다.

한겨울 낮에 산에 가면 나무 사이사이로 눈이 쌓이고 산길엔 우리 차가 덩그러니 놓여있는데 아빠는 나무 주으러 저 멀리 가시고 난 무서움에 우리 차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기억이 난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도깨비든 뭔가가 나타날 것 같아서 여차하면 기차 화통 삶아 먹은 목소리로 아빠를 부를려던 참이었다. 그때 알았다. 산은 낮에도 밤에도 무섭다는 사실을.

반대편으로 넘어가서 본격적으로 밭떼기 장사를 하셨는데 한 차에 서너 명이 타고 다니며 여름엔 장수, 무주 겨울엔 해남, 진도, 봄과 겨울엔 그 동네 근처에서 작업을 하러 다녔다. 온갖 채소를 다 작업했었는데 대표적으로 배추, 무, 대파를 했었다. 한 번은 한여름에 배추작업을 하는데 아빠는 칼로 배추 밑동을 자르시며 앞으로 죽죽 나가시고 우린 잘라진 배추를 차 근처로 나르는 일을 했는데 아빠는 왜 편한 거 하시고 우린 왜 힘든 거 하지? 하고 잘라 보았는데 진짜 힘든 일이었다. 이래서 남이 하는 일이 쉬워 보여도 쉽다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럼 그럼. 

작업을 따라갈 때마다 간식을 사주셨는데 여름엔 빵이나 햄(와 그땐 생햄도 맛있었다. 먹고 탈 나지 않았으니 그리고 일한 다음에 먹는 거라 꿀맛과도 같았다.), 우유 등을 사주셨는데 그거 먹으려고 따라나서기도 했다. 왕복 2~3시간에 작업시간은 1시간 내외. 그리고 간식타임. 가게에 있으면 엄마가 계속 심부름을 시켜서 따라나섰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지금도 누구만 보이면 이름 불러대셔서 가족끼리 또 시킨다며 시시덕거린다. ^^ 겨울엔 해남이나 진도에 대파 작업을 하러 내려갈 때마다 간식 말고 아침밥을 사주셨는데 반찬이 20여 가지 나온 식당이었나? 전남인데도 불구하고 전북 맛이 나서 맛있었던 기억이 아직까지 난다.

대학 친구가 고생했어 집에 가서 쉬어 라고 했을 때 쉬어? 쉬는 게 뭐지?라고 속으로 생각했었다. 우린 집에 잠깐이라도 있으면 불려 나가고, 가게에선 배달하느라 구르마 끌고 아파트 돌아다니고, 아빠랑 작업 다니고 쉼이란 게 없었고 온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 그쯤이었나 보다. 아빠는 왜 고생했어 수고했어라는 말 한마디를 안 하실까?라는 서운함이 대학생 때 나와 삶이 다른 친구들을 보며 느꼈던 것 같다. 무뚝뚝한 성격이어서 아주 오랜 시간 지나 반주 한잔에 웃으시며 말씀하시는 거 보고 알았다. 얘네들 나랑 일하고 오면 포장마차에서 소주 각 1병씩 마셨다며. 맛있는 안주에 술 한잔 사주시는 게 아빠의 다독거림이자 표현이셨음을. 작업할 땐 몰랐는데 커서 보니 그 배추 무 대파 하나하나가 소중한 보석이었다. 그것들을 팔아 우리 가족들이 배고픔 느끼지 못하게 해 주었고, 따뜻한 방에서 자게 해 주었고, 네 명 다 대학교 졸업하게 해 주었으니. 부모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그 삼총사를 농사짓고 계신다. 자식들 먹을 거라 농약도 적게 주시고, 바다와 같은 부모님 마음을 내가 부모가 되었어도 평생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쎄렉스 포터 프런티어 포터 순으로 트럭들이 우리 집에 들어와 힘든 일 하고, 폐차장으로 가고 그러했다.

구불구불한 시골길에 무거운 채소들로 인해 차가 많이 망가져 갔다. 가로수에 들이받기도 하고, 배추 한차 싣고 가다 논으로 전복되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고, 차가 고장 나서 트럭 뒤에 누워 무주의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갔던 기억도 난다.  고마워 트럭들!

인생이 마음처럼 안되고, 남 부러워하지 말고 살으라는 말씀.

꼭 해주고 싶으셨다고 한다. 네 새겨들을게요. 배추 대마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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